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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윤동주의 가장 아름다운 새벽감성, 「별똥 떨어진 데」 음미해보기

by 윤해환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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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윤동주의 산문들

윤동주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9할은 「서시」라고 답할 것이고, 나머지는 「별 헤는 밤」 「병원」 「자화상」 따위를 언급할 것이다. 실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기출문제나 평가원 모의고사에도 출제된 작품에는 모두 윤동주의 '시' 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시(운문)뿐만 아니라 4편의 산문(요즘 말로 하면 '에세이'에 대응될 수도 있겠다) 역시 썼다. 그 4편의 산문이란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핀다」 「종시(終始)」이다. 4편의 작품 모두 훌륭하다. 윤동주 특유의 잔잔함과, 웬지 모를 쓸쓸함이 저절로 묻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읽자마자 나의 가슴을 후벼판 산문은 「별똥 떨어진 데」였다. 

짧지만 덤덤한, 윤동주식 '새벽감성'

 우선 그의 「별똥 떨어진 데」를 음미하기 전에, 같이 한 번 전문(全文)을 읽어보자. 책으로 보면 그렇게 긴 글은 아니지만, 휴대폰으로 보면 길 수도 있으니 천천히 읽으면서 음미해보자.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방듯이 받들어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위치에 또 다른 밝음(明)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킨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잡기에는 나 자신이 둔질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에 나에게 있어 어런 적처럼 한낱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박깜박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화사(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훠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장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럴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년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밤이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의 작품을 읽다보면, 빼놓지 않고 말해야할 시간적인 배경이 '밤'이다. 윤동주는 밤을 아주 좋아한 것 같다. 애초 그의 동시 중에도 「밤」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고, 「돌아와 보는 밤」을 보면 불을 끔으로써 낮의 연장을 막고, 밤을 들이는 모습이 나타난다. 윤동주의 백옥같은 시상은 대부분의 밤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해본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연관지을 만하다. 보통 사람들이 소위 '새벽감성'이라고 말하는 시기 역시 어두운 밤이다. 낮을 이성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밤을 감성의 시간으로 이분하는 은유 역시 많다. 

윤동주 역시 「별똥 떨어진 데」를 밤이된 시점에서 썼다. 아무래도 그 특유의 예민한 문학적 감성을 지닌 소년에게 밤이 되면 온갖 심상이 들어왔나보다. 그 다음, 그는 창문 밖의 '하늘'을 보면서 모든 것이 어두워진 세상을 음미해본다.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윤동주는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을까. 다른 사람의 회고를 보면(정지용의 쓴 윤동주 시집의 초판본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방에만 갖혀 있었던 샌님은 아니었고, 축구 같은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 같다. 하지만 당췌 말이 없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비밀스러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였을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문학'이라는 키를 갖고 있다. 윤동주는 여기서 '어둠'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서 자라고, 어둠에서 그대로 생존한다. 과연 여기서의 어둠은 무엇이였을까. 학교에서 배웠듯,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어두움은 당연 '일제강점기의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는 시대가 주는 슬픔 외에도 (「바람이 불어」에는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는 어구가 나온다.) 세상 자체를 바라보는 데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않았을까. 거시적으로는 전쟁이 인간의 목숨을 파리보다 못한 것으로 만들었고, 미시적으로는 인간 사회의 끝없는 갈등을 보면서 그 역시 혼란스러웠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어둠'을 그토록 반복한 것 아니였을지,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본다. 

나무가 있다. 

그 뒤 갑자기 윤동주는 '나무'라는 반대되는 화제를 제시한다. 나무가 윤동주의 반대인 이유는 윤동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이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윤동주 역시 나무를 퍽 불행한 것으로 여겼지만, 나무는 상대와의 교류가 있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동주가 무언가 '결핍'된 상태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무와 윤동주는 벗이기는 하지만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뒤쪽에서는 윤동주가 소소하게 '과제'를 못 풀어 고생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윤동주는 마지막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고민하다가, 별똥을 따라가기로 마음먹는다. 곧 그는 그 별똥이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아무리 그가 '어둠' 속에서 생장하고 유지되고 있지만, 그 역시 결국 어떤 별똥을 만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싶었던 것, 혹은 문학가로서, 혹은 지극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충족시키고 싶었던 것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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